‘매표인주’를 아시나요… “아버지의 자식 같은 인주를 버릴 수는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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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매표인주’를 아시나요… “아버지의 자식 같은 인주를 버릴 수는 없죠”
2010.07.20.
ㆍ한때의 영화 접고 하향산업이 되어도 꿋꿋한 외길 최윤석 대표
도장은 곧 그 사람이었다. 모든 공문서와 계약서에는 반드시 도장이 찍혔다. 도장이 아니면 지장이라도 찍어야 했기에 도장과 인주는 늘 짝으로 붙어다녔다. 가정집과 사무실, 어디에서나 인주는 필수품이었다. 그러나 디지털의 온라인 문서결재가 보편화되고 도장 대신 간편한 서명이 일반화되면서 도장과 인주는 설 자리를 잃게 됐다. 현재 국내 인주 시장의 85%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매표화학은 1946년 설립돼 국내에서 인주를 생산한 지 가장 오래된 회사다. 이곳 역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부침을 겪고 있다. 컴퓨터가 보편화되면서 아무도 쓰지 않을 것 같지만 그러나 주요한 법률 문서에 없어서는 안될 도장과 인주. ‘매표인주’의 현재가 궁금해진 것은 이 때문이었다.
매표인주를 생산하는 매표화학은 서울 한복판에 있다. 그것도 장충동에 있는 한옥집에 말이다. 몇해전 모 포털사이트에 어느 네티즌이 ‘매표인주를 아시나요?’라는 이름으로 사진을 올리면서 실시간 검색어 2위에까지 오른 바로 그 집이다.
“어릴 때에는 우리도 번듯하게 공장 짓고 회사에 투자를 좀 하자고 했지만, 아버지께서는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사업이 아니라 내실이 튼튼한 사업을 해야 한다고 하셨지요.”
3년 전 작고한 창업주 최상봉 회장의 뒤를 이어 현재 매표화학을 이끌고 있는 최윤석 대표(46)는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쑥과 기름, 안료 등 10여가지 재료를 섞어 만드는 인주 제조 과정은 물론 지금은 할아버지가 된 직원들의 젊은날을 지켜보며 자랐다.
평소 근검절약과 기업가로서의 사회책임을 강조하던 최상봉 회장은 어린시절부터 아들에게 가업을 물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빨간 인주를 태어나면서부터 보고 자란 아들은 다른 일, 다른 세상을 보고 싶어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완고했다.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낸 아버지는 가업을 이으며 100년을 가는 일본의 중소기업을 본받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대학 졸업하고나서 바로 아버지 옆에서 일을 거들었죠.”
바지런한 그의 아버지는 지병으로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 80대의 나이에도 매일 아침 압구정동 자택에서 장충동 공장까지 꼬박꼬박 출퇴근했다. 사람을 중히 여긴 고 최 회장은 직원들을 가족같이 대했다. 그래서 이직률이 낮다. 지금도 40여명의 직원 중 40여년간 근무한 이들이 10명이나 되고 대부분 10년 이상 다녔을 정도다.
스물한살에 결혼해 60여년을 해로한 전형무 여사(88)는 처음 인주를 만들어 팔던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할아버지(남편 최 회장)가 중국에서 공부를 했는데 대학을 마친 다음에 친척이 하는 인주공장에서 사무를 봤어. 그러다가 46년 쌍림동에 삼성화학공업사라고 차렸지. 그때는 직원이 없으니까 가족들이 다같이 용기에 인주를 담고 그랬어. 영업사원도 없어서 처음에는 할아버지가 리쿠사쿠(룩색)에 인주를 넣어서 지방에 팔러다녔지. 처음에 인주를 만들어 판다고 했을 때 밥은 먹고 살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어. 그런데 6·25전쟁 지나고 몇해가 지나니까 군대에서 인주를 몇 트럭을 가져가더라구. 그때 돈을 많이 모았어. 그래서 쌍림동에서 장충동 한옥집으로 이사를 했지.”
학표인주라는 이름으로 인주를 팔던 친척은 매표인주가 잘 나가자 사업을 접었다. 매표화학의 독점시대가 시작됐다. 매표인주의 전성기는 60~80년대였다. 문구도매업체의 영업사원들이 인주를 받아가려고 줄을 섰다. 관공서는 물론이거니와 청와대에 납품하는 국새용 고급인주도 이곳에서 생산했다. 1년에 한번 조달청 납품기일이 다가오면 3~4일간 야근을 하며 하루 5000개 이상을 생산했다. 2002년까지 선거 때 쓰는 기표용 인주도 이곳에서 만들었다. 수요가 꾸준하니 직원들의 월급이 한번도 밀린 적이 없고 어음을 발행하거나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일도 없었다. 최 회장은 문구산업에 이바지한 공로로 국민훈장 석류장(1985)과 동백장(1995)을 수상하고 2003년에는 동탑산업훈장까지 받았다. 그는 인주를 팔아 번 돈으로 고아원, 교도소 등에서 봉사활동을 했고 출소자나 성년이 된 고아들이 사회에 본격진출하기 전 공장에서 일하며 세상살이를 깨우치도록 도울 정도로 사회환원활동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시대는 달라지고 있었다. 90년대 중반 서서히 컴퓨터가 보급되고 2000년대 들어 전자결재가 일반화되면서 인주 수요는 급감했다. 한해 100만개 이상 생산하며 매출액이 80억원 가까이 나가던 시절도 있었지만 업무환경이 달라지면서 인주의 수요는 줄었다. 지난해 매출액은 40억원.
그래도 인주는 여전히 매표화학의 주력상품이다. 74년부터 스탬프를 함께 생산했지만 아직까지도 인주 대 스탬프의 생산비율이 7 대 3에 달한다. 그러나 초창기 인주 가격에 비하면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값이 크게 오르지 않았다. 현재 각종 케이스에 담겨 팔리는 인주의 가격은 500원에서 1만원으로 크기와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69년 당시 180원이던 매표인주 no.100의 가격은 현재 2000원이 조금 넘는다.
수요가 줄어든 데다 한번 사면 몇년간 쓸 정도로 인주는 순환율이 빠르지 않다는 것도 약점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최 대표는 사무용 인주·스탬프 생산에서 벗어나 고급화에 승부를 걸고 있다. 지난해부터 동양화, 서예 등에 쓰이는 고급 낙관용 인주를 개발하는 데 공을 들여 올 들어 생산에 성공했고, 까다로운 일본의 서화예술가들에게도 품질을 인정받아 수출주문이 들어왔다.
“3년된 쑥을 넣는 등 고급 재료로 만들었습니다. 늦기는 했지만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마무리할 때 우리 손으로 만든 인주를 쓰는 걸 보면서 마땅히 할 일을, 자랑스러운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 중국에서도 아직도 인주는 전통서화재료의 필수품이죠. 고품질 제품을 생산하면 중국과 일본에서도 승산이 있다고 봅니다.”
가업승계모임인 ‘차세대 A.C.E’의 초대 회장을 맡기도 한 그는 “인주가 하향산업이 됐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인주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앞으로도 인주 생산을 계속하겠다는 뜻을 확고히 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병상에서도 인주 생산에 열정의 70%를 쏟아부으라고 말씀하셨어요. 인주를 쓰는 이들이 전 국민의 1%밖에 안된다 하더라도 인주를 버려서는 안된다고 하셨죠. 아버지의 자식 같은 인주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 제가 있는 동안 회사를 잘 이끌어서 제 아들들도 인주를 계속 만들 수 있도록 100여년 전통의 기업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원문보기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7201730025&code=900315